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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칼럼] 연민과 애도
2017년 05월 22일 (월) 15:06:56 신혜정 작가 olivej@hanmail.net

 

 

어떤 사건은 그 사회의 집단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1994년 성수대교의 붕괴, 뒤이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눈부신 속도로 성장해온 한국 사회의 신화들이 부실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태 후에 우리는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았다.

현장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실시간 뉴스로 목격해야 했던 사람들은 2주의 고립 끝에 구조된 생존자의 소식에 환호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트라우마는 굳건히 믿고 있던 것에 대한 의심, 어제의 건축물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소멸에 대한 회의, 말미에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들이 뒤죽박죽 섞인 것이었다. 당시의 그 심리상태를 완벽히, 그보다 더 끔찍하게 복원해 낸 것이 바로 세월호의 침몰이었다. 수학여행 길에 오른 한 학교의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4백여 명의 인원이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실시간으로 가라앉았다.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당시의 구조 상황과 이해할 수 없는 정부의 대처들은 30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당시 죽어간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던 세월호 키드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무심하게 생명에 관한 심각한 소식들을 흘러가는 바람처럼 접하고 흘려보낸다. 교통사고 사상자, 내전 국가에서의 민간인 폭격, 심각한 기아로 고통 받는 이들의 소식 등은 뉴스라는 이름으로 톤이 일정한 아나운서의 입에서 발음되어 흘러나온다. 소식을 듣는 중에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으며 순간 마음이 동요할 수는 있으나 일상은 그대로 흐른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아서 뉴스를 듣고 무심히 밥상의 그릇들을 비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일상들을 지나다 문득,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일테면 언젠가 중국으로 단체 연수를 떠났던 공무원의 관광버스가 전복돼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 같은 것. 연수의 목적은 며칠간의 단체 관광에 가까웠다는 것이 뒤이어진 내용이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놀러 가서 다친 것 아니냐는 댓글들이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사고는 애도 대신 비용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트라우마, 세월호. 침몰 후 세월호를 애도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시위현장 옆에서 치킨을 배달시켜 먹던 사람들, 그리고 단순한 해양 교통사고인데 보상금을 타고자 한다며 유족들을 시체팔이라고 내몰았던 사람들 또한 같은 사회의 일원이다.

관광연수를 간 공무원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비용에 대한 문제로 치환하는 태도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20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때 우리는 생존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그 사이에 자본이 끼어 들었다. 죽음 앞에서도 계산기를 두드려 손익을 따져야 하는 사회. 그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으로 움직이는 이 세계가 함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동급생들의 죽음을 봐야 했던 세월호 키드들이 대학생이 되어 학년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에 잠겨 있었고 침몰의 원인과 부실한 대처에 대한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놀랍게도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파면당한지 12일 만에 인양작업이 착수되었고, 세월호는 건져 올려졌다.

그리고 민의가 세상을 바꾸었다는 희망의 움직임들, 전례 없는 5월의 대선으로 사회는 들썩이고 또 재편는 중이다. 그러는 중에도 봄은 왔고, 민초들의 삶은 달라질 것도 없는 것이어서 대학에서는 예정된 중간고사를 치르고 탄핵이 인용된 날에도 취업을 위한 면접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산다.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계산하는 방식은 우리의 무기력함을 반증하는 거울이다. 대형화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구조를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각박한 세계가 개인에게 가하는 방식 그대로의 프레임을 삶에 적용시킨다. 죽음을 보상금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무기력을 드러내는 또다른 방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가 어떤 변화를 맞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일상적 삶은 지금과 같이 흐르겠지만, 그 가운데 서로를 연민하고 생명을 애도하는 마음으로의 회귀가 절실히 필요하다. 연민과 애도야 말로 우리의 무기력을 스스로 떨쳐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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