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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그 야만의 역사를 되새기다
2016년 11월 05일 (토) 18:01:08 이연제 기자,송예빈 기자 ckunp@naver.com

부컷: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

일본 측 주장 종군위안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 일제는 전쟁 동원을 위한 인력 조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의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신대는 남녀 모두 그 대상이 되었는데, 농촌정신대·보도정신대·의료정신대·근로정신대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경우를 여성정신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성정신대의 일부가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됨에 따라 정신대라는 말이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으나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과거에는 정신대를 종군위안부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라는 뜻에는 종군기자처럼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나아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함께 숨겨져 있다. 따라서 기존에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따라서 범죄의 주체를 분명하게 밝힌 일본군 위안부가 가장 타당한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창설과 그 참상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창설됐다. 당시 일본군 병사들의 중국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 심화되자 파견군 참모장이었던 오카무라중장은 나가사키현 지사에게 군대위안부의 모집을 부탁하였다. 그는 뒷날 옛날에는 위안부라는 것이 없었는데 부끄럽게도 나 자신이 위안부의 창설자이다.……현재 각 병단은 거의 전부가 위안부단을 수행시켜 병참의 1분대로 되어 있는 형편이다.”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군대위안부 정책은 19377월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을 자행한 일본군 병사들의 중국인강간만행으로,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점령 정책에 지장을 받게 되자 본격화되었다. 19417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특별대연습이 개시되어 8월 초 약 70만의 병력이 동북삼성(東北三省) 소련 접경지에 집결하였다. 이 작전은 취소되었으나 계획에는 위안부의 동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위안부 모집은 강제적 동원의 단계로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도··면에 동원 칙령을 은밀히 하달하고 면장 책임 하에 위안부를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동원책들은 간호보조나 군수공장의 여공 등으로 일하게 해준다고 속였다. 그러나 이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사람사냥으로 위안부를 충원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수행에 따른 극심한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대대적인 인력 동원을 실시하였다. 이에 여성들도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다고 한다. 성노예 여성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국으로서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가 관련당사국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것에 비해, 위안부는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잘못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질타를 받기도 하다가, 나중에나 진실이 밝혀지고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 등을 포함해서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기에 지금도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심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있다. 일본 측의 입장은 크게 3가지로서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문서상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일보 등의 기사 보도에 의하면 월 300원에서 최고 3천원 이하의 수당을 준다고 보도돼 있다. 자발적 참여의 근거로는 여성들의 서명이 담긴 문서와 일본 여성 참여의 증거 등이 있는데, 일부 여성들은 취업 서류로 알고서 서명했다가 끌려간 경우도 존재한다. 대가론의 경우 당시 지불됐다라는 임금 자체도 여성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았을 뿐더러 강제성과 인권 모욕의 경우는 대가로 어떻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에서 논점이 이탈된다. 하지만 실제 당시 여러 기록이나 증언들을 보자면 위안부의 징집 절차에는 친일파 조선인이 다수 협력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사실도 존재한다.

  부컷: 수요집회

수요집회(水曜集會)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이다.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日本軍 慰安婦 問題 解決定期 水曜示威)이다. 수요집회는 199218,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대한민국 방문을 앞두고 시작되었으며 그 후로 정기적인 시위로 발전하였다. 수요시위는 정대협이 주최하고,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 학생들, 풀뿌리 모임, 평화단체, 종교계 등 시민들이 시위를 기획하여 이끌었는데, 일본에서 방문한 평화활동가를 포함하여 외국인들의 참여도 상당하다. 수요시위는 1.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2.위안부 진상 규명 3.일본 국회의 사죄 4.법적 배상 5.역사교과서 기록 6.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7. 책임자 처벌의 조건들을 요구하면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공휴일을 제외하고 이루어진다. 다만,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지진 희생자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 시위를 대신했다. 2016215일까지의 조사결과,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193명이 사망하였고 45명이 생존해 있었으며, 일본 정부는 수요시위나 정대협의 요구 사항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20111214일에는 1000번째 수요시위가 있었다. 이 수요시위에는 길원옥, 김복동, 박옥선, 김순옥, 강일출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5명과 정대협 구성원 그리고 3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전 국무총리 한명숙, 한나라당 전 대표 정몽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유정현·김성회, 민주당 최고위원정동영, 민주당 정책위의장 박영선, 민주당 전 원내대표 원혜영,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최영희·이미경·전현희, 민주당 소속 전 국회의원 정봉주, 통합진보당 공동 대표 이정희,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백기완, 배우 김여진 등도 집회에 참석했다. 배우 권해효는 사회를 맡았다. 일본 정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소녀를 형상화한 '평화비' 제막식도 진행되었다. 1000회 수요시위를 기념해 대한민국 내 9개 지역 30개 도시, 세계 8개국 42개 도시 등에서 연대 행동도 이어졌다. 수요집회는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 기간 집회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이 기록은 지금도 매주 갱신되고 있다.

 

 부컷: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

지난해 1228, 박근혜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 합의를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하여 이에 대해 일본과 협상하여 최종적 종결을 약속했다. 이에 아베 신조 총리는 총리대신의 자격과 고노 담화의 내용과 동일한 서면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한다고 전했다. 28일 오후 회담을 마치며 윤병세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서울특별시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합의사항을 발표하였다.

국민들의 거셌던 일보군 위안부 협상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 타결을 택한 정부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에 청와대에서는 이번 협상이 오랜 고심 끝에 내린 신중한 결론으로 정부의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어렵게 해결된 위안부 문제에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국 모든 문제가 24년 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밝혔다. 또한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피해자들의 상처만 깊어지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을 더하며 이 이상의 유언비어는 위안부 문제의 또 다른 흠집을 남기는 것이라 반박했다. 끝으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을 통한 합의를 착실히 이행해 나간다면 이제는 더 이상 한일관계가 경색되지 않고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직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양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현재 2016년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합의 이행 차원에서 지난 7월 말 한국 정부 주도 하에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에 예산 10억엔을 출연하고 위안부 피해자 지원사업을 진행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정부는 이 돈에 배상금성격이 포함돼 있어 현금 지급 등 피해자들에게 직접적 혜택이 돌아갈 사업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배상금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10억엔을 출연하기만 한다면 이제 모든 합의는 이행된 셈이다. 이는 곧 이는 지난 25년간 한·일관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예민한 문제였던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926일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소녀상 철거 이면합의 의혹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간 10억엔 합의에 대해 따져 물으며 날을 세웠다. 특히 이날 국정감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직접 참석해 그저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 앞에 잘못했다, 우리가 한 짓이니 용서해 달라, 진심으로 사죄하고 정신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명예를 회복해 준다면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위로금을 받아온 것 자체가 틀렸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말하자면 위로금을 받아 할매들을 팔아 묵은 것 밖에 더 되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더민주 강창일 의원은 이 10억엔이 배상금적 치유금이란 화해·치유재단 김 이사장의 답변에 대해, 할머니들은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줄곧 싸워온 이유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스스로 범죄행위임을 인정하고 반성한 뒤 진심으로 사죄하라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단돈 10억엔에 할머니들의 존엄과 위엄을 빼앗을 수 있는가라며 규탄했다.

이에 한·일 정부가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양국 간 현안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국내적으로는 한·일 합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수용 불가를 주장하며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협상이라는 여론 또한 강하고 넓게 확산되고 있어,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 없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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