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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진공지대(眞空地帶)
2016년 06월 05일 (일) 15:54:55 강우원용 kwwy@hanmail.net

노마 히로시(野間宏)라는 일본인 작가가 있다. 일본이 제국 확장의 광기에 휩싸였던 1941년에 사병으로 징집되어 1944년에 소집 해제를 받기까지 약 3년 동안 군에 있었고,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1952년에 진공지대(眞空地帶)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느 전후문학과 달리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의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오로지 군인들이 생활하는 내무반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1999년 무렵으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는 꽤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독후의 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내가 놀랐던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였다. 첫째는 하급자를 향한 비인간적인 억압과 린치의 고리가 그저 고참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자 추악한 인간의 맨얼굴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러한 비상식적인 상명하복 관계와 숨 막힐 듯 부조리한 공간이 1992년 무렵 내가 직접 겪었던 대한민국 군대 내무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을 견지하는 상식적인 인간은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곳, 인간성을 포기할 때 비로소 견딜 수 있는 진공지대는 해방 후 오랜 시간에 걸쳐 한국사회에 내면화되고 말았다.

19458월 이후 일본은 패전과 함께 미군의 지배하에 놓인다. 7년이라는 피 점령 기간 동안 그들은 수치심을 견뎌야 했지만 오히려 구 제국 군대문화를 청산하고 일소하는 축복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 한국은 군대를 비롯한 기관의 창설자들이 주로 구 제국문화를 체화한 당사자들이었기에 부조리한 군대문화와 더불어 강점기의 잔재를 온존시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장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유신(維新)’이라는 단어를 70년대 한국사회의 지표로 삼았던 의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그 방법이 공포를 수반한 권력과 압제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 또한 이 추론을 방증한다. 좀 더 확대해석 하자면 일본의 구식 군대문화가 만들어낸 진공지대는 이미 일본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사회 어딘가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현실이다.

지성의 요람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해진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학생들은 선후배 사이에 상명하복이라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잊을만하면 도를 넘은 신입생 환영회가 사회면을 장식한다. 폭력은 다음 학번으로 대물림되고, 반복되는 폭력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진공지대가 고착화된다. 학과가 잘 돌아가려면, 우리 전공은 긴장해야 하니까 등의 이유를 들어 눈감는 교수들이 있다면, 그들은 진공지대가 지니고 있는 어두운 폭력의 역사에 무지한 따름이다. 창의적인 상상력과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강조하는 강의실이라면, 그 바깥에서 들리는 경직되고 무기력한 학생들의 한숨 소리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소통보다 통제를 우선하는 국가권력의 태도는 국민을 숨 막히게 한다. 과거 군부독재는 노골적으로 진공상태를 만들어 권력을 유지했다. 일제로부터 학습한 폭력의 유산, 가장 효과적인 통제 수단을 물려받은 그들은, 그러나 자신을 희생하며 독립에 헌신한 유산,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하는 시대정신의 항거에 백기를 들었다. 시대는 변했다.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미 깊게 뿌리를 내려버린 폭력에 길들여진 탓일까? 어느새 우리 사회에는 다시금 발전적인 논쟁이 사라지고, 소모적인 주장과 복종의 강요가 만연해져 버렸다. ‘진공지대가 떠오르며 숨이 막힌다. 하지만 숨이 막힌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4·13 총선 결과라는 뜻밖의 숨 쉴 공간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청와대가 527일 상시청문회 실시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했다. 세월호의 진실부터, 가습기살균제 책임론, 어버이연합 청와대 개입설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비상식적인 논란을 진공상태로 보전하겠다는 숨 막힌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야당과 국민을 생트집 잡기 좋아하는 골칫거리로만 보지 않는다면, 그들의 군기를 다잡겠다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이 아니라면, 4·13 총선의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작금의 진공상태를 진실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되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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