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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칼럼]매뉴얼을 탐독하는 맥가이버
2016년 04월 30일 (토) 10:29:26 박선희 applelppa@hanmail.com

오래된 TV를 버리고 복고풍의 클래식한 TV를 장만했다. 상아색 프레임과 수동 채널 다이얼, 양쪽에 달린 V자형 다리까지, 아날로그 감성의 이 작은 TV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가전제품 대리점에서 나는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구입 의사를 밝혔다. 다른 TV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막상 TV가 배달되고 나니 막막했다. 다리를 조립해야 하는데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는 십자드라이버가 없었다. 리모컨만 누를 줄 아는 기계치라 몇 개씩이나 되는 잭을 어디에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는 당연히 몰랐다. 되는 대로 해보았지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엔 파상의 물결만 정신없이 아른거렸다. 어떻게든 다리만이라도 연결해보자. 기사를 부른다 해도 TV는 세워놓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아파트 시설관리를 하는 아저씨께 연락해 사정을 얘기하고, 십자드라이버를 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예전에 세면대 관이 막혀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다가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근처에 있다며 곧 들르겠다고 하셨다. 커다란 공구통을 들고 나타난 아저씨는 TV가 어디 있냐며 안으로 들어오셨다. 십자드라이버를 빌려주러 온 게 아니라 조립을 해주러 오신 거였다.

TV 다리는 1분 만에 조립되었다. 방을 돋보이게 하는 비주얼에 잘 샀다생각하며 아저씨에게 음료수를 대령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음료수 잔을 옆에다 놓고는 잭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부를 거라고 말했지만 잠깐이면 된다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일반 TV와 구조가 다른지 10분이 지나도, 15분이 지나도 화면은 재생되지 않았다. 바쁘실 테니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내 말은 듣지도 못한 채 TV에만 집중했다. 나중엔 매뉴얼까지 펼쳐들고 탐독하듯 읽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넘어 있었다. 종일 아파트를 돌며 일을 했는지 아저씨에게서 시큼한 땀내가 났다.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아저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분이었나? 평소 아저씨에 대해 가졌던 인상이 한 순간에 바뀌고 있었다. 아저씨는 늘 때 탄 작업복 차림에 반백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고, 말까지 어눌해 어쩌다 관리사무소 직원 대신 단지 내 알림 방송을 할 때는 뭔가 실수를 할까봐 불안하기도 한,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날의 아저씨는 자기가 하는 일에 백 퍼센트를 다하는 나이스한 남자였다.

마침내 복고풍 TV는 선명한 화면을 선보였고, 아저씨는 얼굴 가득 뿌듯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마시고 가셨다. 아저씨가 더 멋져 보였던 것은 며칠 지나서였다. 집을 나서다 아파트 현관에서 마주쳤는데,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TV에만 몰두하느라 TV 주인은 보지 못한 거였다. , 멋지다. 사람에게서 신선함을 느끼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땅엔 겉만 번드르르한 허세가가 얼마나 많은가. 뻔뻔함과 탐욕, 권력욕을 무기로 사람에게 사람 아닌 짓을 하는 리더와 고위층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들이 주는 지독한 피로감 때문인지, 눈에 띄지 않는 이들이 주는 작은 감동들은 더욱 청량하고 짜릿하게 다가온다. 희망은 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 구석구석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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