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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역사와 기억
2015년 11월 30일 (월) 16:01:19 이윤일 교수 ckunp@naver.com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에게 자연적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시간은 역사적 시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부여 과정을 통해 인간의 시간은 역사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과거 행위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인 역사학이 탄생하고, 역사학에서 인간은 역사적 의식을 가진 존재로 규정된다. 역사는 인간이 시간 속에서 영위한 자신의 삶을 언어로 보존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우리의 현재 자화상을 확인하며, 그것을 거울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기획한다. 철학적 시각에서 역사는 인간의 시간적 실존에서 오는 구체적 선조건들의 총화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결코 극복하지 못할 실존의 한계를 설정한다.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사의 관점에서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을 숭앙하고, 안중근 의사를 경외하며,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싫어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폄하한다.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구성되었듯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추억-행동-희망이라는 시간 구조에 수동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동시에 시간을 능동적으로 의식하는 우리는,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시간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꿈을 미래에 투영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앞서서 존재하며, 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뒤에 존재한다. 시간적 존재로서 우리에게는 기억과 망각이 하나로 혼재한다. 개인사적으로 매년 되돌아오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기억을 위한 시간 장치이다. 즐거운 일을 기억해내는 것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애통한 죽음과 같은 불행한 일에 애도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은, 기억할 시간과 단절하고 망각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슬픔을 잊지 않으면 행동은 정체되고 미래를 향해 기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뒤돌아보는 존재인 우리에게 역사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한 집단이나 민족이 과거에 저지른 부끄러운 행위를 망각한다는 것은 그 희생자들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일본의 일부 극우 세력처럼 자기들이 마치 과거에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집단을 신임할 수 없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기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망각한다는 것은 도피이자 비겁함이며, 무책임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과오를 망각하는 집단에게는 반성이 없으므로 비난만 쌓일 뿐, 용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광의 과거뿐만 아니라 오욕과 부끄러운 과거도 감추지 않을 때, 그로부터만 진정 미래에 대처하기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5.16 쿠데타, 군사 독재 등, 우리 현대사의 갖가지 불행한 사건에 의해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애도 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오의 당사자를 미화하는 과거사만을 기억하겠다는 맹랑한 집단이 있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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