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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운동사로 본 한국 노동시장 구조
2015년 10월 03일 (토) 12:44:02 김경세 기자, 오준석 기자, 김유리 기자, 윤한규 기자 ckunp@naver.com

   

 

근대적 노사관계의 시작: 해방 이전의 노동운동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의미의 노사관계는 일제에 의해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는 1920∼1930년대에 확립됐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식 계획을 통해 식민지 수탈구조의 물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면서 공장 근로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당시 공장노동자들은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해야했으며 다른 나라에 비해 저임금이었던 일본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일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때 노동운동은 봉건관료나 외국 자본가의 수탈에 대항해 자연발생적·미조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은 1906년 설립된 평남 진남포의 조선노동조합이다. 1919년 3·1운동 전후로 일본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태도를 바꾸면서 노동운동 또한 전국적 규모의 근대적 노동운동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당시 중앙조직의 효시로는 1920년 4월 3일 박종화 외 240명의 발기로 설립된 조선노동공제회가 있다. 또 1924년에는 182개 단체의 가맹으로 이루어진 조선노동총동맹이 설립됐다. 조선노동총동맹은 이후 조선농민총동맹이 떨어져 나와 2개로 분리된다. 이때 노동조합의 특징은 활발하게 활동하나 공제조합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노동조합을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은 더욱 더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1925년 경전 종업원 대파업 ▲1928년 영흥 총파업 ▲1929년 원산 총파업 ▲1930년 부산 사직회사 파업이 그 예다.

이데올로기와 노동시장:

1945∼1960년 1945∼1960년에는 외부환경이 노동운동 이념 및 전략을 결정하는 타율적 발전과정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해방 후 미군정당국은 1945년 10월 30일 군정법령 제19호 국가긴급사태 선언에서 “과거 36년간 존속해온 절대적 노예상태로부터 노동자를 구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노동조합 결성 보장과 파업, 태업, 직장폐쇄 등의 쟁의행위를 허용했다. 그리고 정부수립 이후 제헌헌법에 노동 3권이 제정되고 ▲노동조합법 ▲노동쟁의 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및 근로기준법 등이 제정됐다. 그 결과로 당시 현실과 문화적 차이는 있었지만 외형적으로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노사관계 방식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당시 미국 반공조성의 여파를 노조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1945년 11월 5일 좌익진영에 의해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결성됐다. 전평의 행동강령은 주로 임금 및 노동조건에 관한 기본적 요구로 초보적 민주화 조건 달성에 바탕을 뒀다. 이에 맞서 민주진영은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 노동총동맹(이하 대한노총)을 설립했다. 대한노총 행동강령은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 ▲노사 협조주의 ▲건국 헌신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반공자치단체 성격이 강한 대한노총이 설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전평과 대한노총의 대결구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군정은 1946년 9월과 1947년 3월 전평의 두 차례 총파업을 빌미로 전평을 불법노조라고 포고령을 내리고 해체시킨다. 이후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기관단체라는 굴레 아래 지도층끼리 주도권 쟁탈에 분쟁을 일삼으며 점점 노동자의 권리확보와는 거리가 멀어져갔다. 그러나 4·19 혁명을 통해 자유당에서 민주당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노동자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노동자 요구조건이 관철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졌다. 실제 1947년 말 노동조합 수는 683개, 조합원 수는 127,662명이었는데 1960년대에는 노동조합 수 914개와 조합원 수 321,097명으로 47년 말에 비해 약 3배나 증가했다. 이런 경향을 봤을 때 당시 노동자 자신의 요구보다 외부적 정치 환경과 조건이 노동시장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조 탄압의 시대:

1961∼1971년 1961∼1971년에는 기업 우선적인 노사관계가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자유기업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목적은 경제규모 확대 및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한 고도의 경제 성장이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혁명 포고령 제6호에 의해 한국노련은 해산되었고, 같은 해 8월 3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조직되었다. 한국노총이 등장했지만 노동자의 권익에는 진전이 없었다. 1960년대 광·공업 근로자 실질임금 연평균 상승률을 보면 광업 3.6%, 제조업 3.4%인데 반해 노동생산성은 12.6%를 기록했다. 노동시간은 광·공업 평균 9.5시간을, 영세·중소기업의 경우는 10∼12시간을 기록했다. 이 같은 장기적인 노동시간 때문에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나 직업병 같은 병들이 많이 발생했다. 1963년 4월과 12월에 개정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 조정법 및 노동위원회법 개정도 위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앞서 언급한 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별 노조 설립 ▲노조의 설립 및 노동위원회 결정에 국가개입 여지 마련 ▲노조 단체 활동 제한 ▲노사협의제 권장▲노사협의회와 노동조합 분리이다.

   

 

극한적인 형태의 노동운동 출현:

1972∼1979년 외국자본 도입과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으나 각종 구조적 모순과 닉슨 조치로 국제 정치 환경이 악화됐다. 이에 에너지 파동과 무리한 중화학 공업추진 같은 문제가 겹쳐 정부는 1971년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9조를 통해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완전히 규제하고 행정관청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에 1970년대 노동운동은 다소 과격한 형태를 띠게 된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의 전태일 분신자살 ▲동년 11월 15일 조선호텔 이상찬 분신자살 기도사건 ▲1973년 12월 19일 조일철강사 최재형 자살기도 사건 ▲1974년 2월 대동신철공업사 정세달 살인사건 ▲한진상사 KAL빌딩 방화사건 ▲동일방직 사건 ▲YH사건이 예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은 이후 노동운동의 신호탄이었으며 억압적인 조건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YH사건은 1979년 8월 9일, 가발업체였던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 앞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의원직을 제명당했고, 나아가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으며, 결론적으로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상 유신공화국 멸망의 효시를 쏘아올린 사건이었다. 

 정부 노동정책 미비로 인한 노사분규 급증:

1980∼1987년 당시 집단 노사분규가 급증했지만 정부는 노사분규를 불법이라고 말하면서도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에도 저임금 지대와 최저임금 문제에 대한 정부의 노동정책 미비로 노사분규가 급증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정부는 분규의 원인을 해결하려기 한다보다는 노조를 억압하기에 급급했다. 1980년 12월 국가보위 입법회의에서 노동 관계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주요내용은 ▲산업별 노조체제에서 기업별 노조체제로 전환 ▲노동조합 설립에 제3자 개입 불가능 ▲단체교섭 위임 불가능 ▲유니온 샵 제의 불인정 ▲노동조합 재무사항 공개의무이다. 또 노사협의법 5조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과 기타 모든 활동은 이 법에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해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권한과 노사협의회를 분리 해놓았다. 

 노동자대투쟁과 전노협 결성:

 1987년 6·29 선언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은 노동운동의 양·질, 조직형태와 규모 그리고 노동운동 성격 등의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노동자대투쟁은 1987년 7월에서 9월까지 벌어진 대한민국의 전국적 파업투쟁이다. 87년 7월, 8월 2개월간 3천여 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으며, 이 파업투쟁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조직화가 급속히 증대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으로 인한 정치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발생했으나, 6월 항쟁과 달리 정치권과 중산층의 외면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1987년 11월 28일 개정된 노동조합법 제반규정에는 노동조합 설립형태 자유화와 정부의 관리·감독 완화를 내용으로 한다. 이는 노동조직의 획기적 확대와 대규모 사업장에 노조 조직률이 증가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또 사무직 노동자 조직이 확대 됐으며 지역별·업종별·그룹별로 노동조합 조직의 연대가 강화됐다. 노사분규 발생업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3,749건의 노사분규를 살펴보면 분규 발생업종이 제조·운수·광업 중심이었는데 점차 전 업종으로 확대되는 양태와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발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노동조합 협의회(이하 전노협)가 등장했다. 전노협은 지역노조협의회와 업종별협의회를 조직적인 두 축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들 연대조직들은 기업별 노조를 기초로 했다. 합법적 노조설립을 위해서는 상급연맹내지 노총의 인준필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합법성을 획득한 사무금융노련 산하 노조들을 제외하고는 각 개별노조가 당시 유일한 합법 중앙조직인 노총에 가입해 있어 ‘전노협’은 독자적인 단체교섭권과 행동권이 합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임의 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신자유주의 확산과 노동 시장의 유연화:

IMF 이후 오늘까지 한국은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미증유의 시련을 겪게 됐다. 이런 상황에 따라 우리나라의 불안정노동자 수는 급증가하게 된다. 97년 3/4분기 주당 36시간 미만 일하는 파트타임 취업자는 164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나 증가했다. 특히 여성 중심 파트타임 노동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임시 또는 일용 노동자의 경우도 파트타임 노동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시·일용 노동자 수도 계속 증가해 동년 2/4분기에 606만 명을 기록하면서 전체 노동자의 45.5%를 기록했다. 노동자가 중도채용과 기업 간 이동이 어렸다는 점도 상황악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정노동자 수의 급증은 실업자 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97년 정리해고 또는 유사한 방식으로 직장을 떠난 노동자는 무려 3만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을 외국과 비교했을 때도 상황은 좋지 않다. 우리나라의 파트타임 취업자 같은 경우는 유럽의 파트타임 취업자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유럽 같은 경우는 주부 등의 보조적 파트타임 노동자에 의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꾀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규직과 거의 같은 노동시간에 고용직 계약 기간만 짧다. 그리고 해고의 경우에도 한국은 영구해고가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미국은 일시해고제(lay-off)가 일반적이다. 미국의 일시해고제는 선임권 원칙을 준수하여 근로기간이 짧은 노동자부터 해고하고 재취업 시에도 근속연수가 긴 노동자부터 재취업시킨다. 한국은 정반대로 부양가족이 많은 50대 이상의 연령층이 해고확률이 높고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청년실업과 프리타족의 양산으로 노동시장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정규직 일자리는 찾기 어렵고, 저임금 임시계약 형태의 노동형태가 확산되면서 청년들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현실이다. 암울한 현재의 노동시장 구조는 임금피크제 도입이나 일반 해고 등으로 해결될 수 없다. 아버지 월급 깎아서 아들 채용한다는 식의 발상으로 일자리를 늘릴 수는 없다. 일반해고 역시 저성과자로 낙인찍힌 노동자를 쉽게 해고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일 뿐, 신규채용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다. 자본과 기업의 입장에서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것도 놓칠 수 없는 것이지만, 국민 대다수의 노동 여건과 고용 조건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 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경동, 『노사관계의 사회학』, 경문사, 1988. 김성진, 『한국의 노동조합』, 한국노동문제 연구소, 1979. 김수곤, 『한국노사관계론』, 경문사, 1992. 이덕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당면과제』, 한국인문사회과학회, 1992. 신두범, 『한국노동정책론』, 숭의사, 1970. 윤진호, 『IMF 시대의 노동시장과 고용위기의 극복방안』, 황해문화,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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