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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화’의 어제와 오늘
2015년 04월 04일 (토) 22:05:14 조윤찬 기자, 이연제 기자 ckunp@naver.com

청년문화란 젊은 세대, 특히 10대와 20대에 해당하는 세대의 독특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문화이다. 한국에서 청년문화는 주로 1970년대 초반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서구의 라이프스타일과 대중문화를 추종하는 흐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가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강제로 퇴출되었고 이후 청년문화라는 용어 자체도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성의 지배문화와 갈등하는 청년 세대의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는 진보적 성격의 민중문화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이런 문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대학이었고 대학생들의 진보적 민중문화가 당대의 기성 사회의 대중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1990년대 이후 10대 청소년 계층의 문화가 대중문화 시장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청년문화 대신 청소년 문화 혹은 신세대 문화라는 용어가 논란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청년문화가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했고 현재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아보자.

   

부컷: 저항문화의 시작, 60년대

60년대 미국과 서구사회에서는 히피족이 등장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히피는 1960년대 미국샌프란시스코, LA 등지 청년층에서부터 시작된, 기성의 사회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탈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히피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으로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락페스티발의 시초였으며, 당시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물질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기존체계에 대한 저항의식의 한 표현이었다. 2박 3일 동안 진행되었던 공연에서는 당시 락음악을 이끌던 짐 모리슨, 지미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산타나, 핑크 플로이드 등의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후 이들이 추구했던 반문화는 낭만주의나 회고주의 속에서 점점 희석되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사회 관습과 가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행동양식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아더메치족’이 생겨났다. 이는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의 준말로, 사회를 냉소하는 소수집단을 의미했다. 이밖에도 60년대 후반에는 냉소적인 유행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웃기네’가 있었는데, 이 말이 유행한 것은 1968년이었다. 이와 관련한 재밌는 일화로 월남에 파병된 병사가 월남 아가씨와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울며 매달리는 아가씨를 향해서 병사가 ‘웃기네’라고 말했다. 병사는 무슨 뜻이냐 묻는 아가씨에게 한국말로 ‘안녕’이라는 의미라고 알려주었고, 병사를 태운 배가 부두를 떠날 때 아가씨는 울먹이며 ‘웃기네’를 연발했다는 일화이다. 물론 그럴 듯하게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베트남 파병이라는 60년대의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60년대는 통틀어 실용적인 패션이 중시됐으나, 관능적인 스타일이 시즌별로 유행을 탔다. 초반에는 플레어스커트에 벨트, 비대칭으로 주름을 처리한 뱀파이어스타일이 나타났고, 후반에는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스타일이 유행했다. 미니스커트는 일각에서 허벅지가 드러나 흉하다는 혹평도 받았으나, 세대의 도덕률에 저항하는 청년들의 감각을 반영하면서 대대적인 유행을 탔다.

이어 60년대의 청년문화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음악 감상실의 성행과 건전가요로 불린 정책가요의 대두였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음악다방들이 줄줄이 문을 열었는데, 60년대 중반부터는 지방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하여 청년학생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음악 감상실에서 이종환·김동욱·김인권·원종관 등의 DJ가 큰 인기를 끌었다.

   

부컷: 포크송의 전성기, 70년대

70년대의 대학문화 또는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청바지와 통기타를 드는 데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와서는 유신체제의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반항의 표상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이것들이 60년 후반 서구와 미국을 휩쓴 베트남 참전 반대투쟁, 인종차별반대투쟁, 여성해방운동과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사회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된 ‘스튜던트 파워’는 정치적인 좌절과 함께 청바지와 장발, 밥 딜런의 저항노래, 그리고 히피문화를 낳았고, 우리나라에는 통기타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와 장발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런 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가요가 70년대 한국의 한 주류를 이루면서 위력을 떨쳤다. 양희은·하남석·박인희·이필원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크 계열의 노래들이 그것이었다. 이들 대부분 이른바 ‘학사 가수’들이었고, ‘싱어 송 라이터’였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 김민기의 「친구」, 송창식의 「고래사냥」, 양희은의 「아침이슬」 등은 사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담았다고 하여 금지곡이 됐지만, 대학가에서는 꾸준히 애창되었다. 대학의 시위현장에서는 「아침이슬」이, 술자리에서는 「친구」나「물 좀 주소」가 으레 불리곤 했다.

또한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70년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자 세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길거리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풍경 가운데 하나가 가위를 든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발 청년의 모습이었다. 또 유신 이후 사회가 얼어붙자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풍경이 등장했으니, 장발과 마찬가지로 규제의 대상이 되었던 미니스커트 단속 현장이었다. 30센티 자를 들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미니스커트 여성을 잡아 세우고 무릎에서부터 길이를 쟀던 것이다. 이어 70년대 후반에는 편안하고 기능성을 강조하는 캐주얼 의상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히피로 상징되는 문명비판, 자연회귀 운동과 영성해방운동의 영향으로 정형을 벗어난 자연스러운 옷차림과 긴 머리, 청바지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부컷: 민중문화와 헤비메탈의 전성시대, 80년대

광주를 살육하고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80년대는 민중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 문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대학이었고 대학생들의 진보적 민중문화가 당대의 기성 사회의 대중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대학가에서는 연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고, 대학은 당시 진보적 이념과 투쟁의 전초기지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단조풍의 민중가요와 투쟁가요, 풍물 등의 전통문화가 민중적․민족주의적 정서 안에서 향유되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꽃다지’ 등의 민중가요패가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산별노조와 지역 단체에서도 자발적으로 문예패나 노래패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당시, 가요계 데뷔의 화려한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도 빼놓을 수 없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다. 199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출전 자체만으로도 소속대학의 스타가 되었을 정도였다. 노사연·배철수·신해철·심수봉·유열·이정석·조하문 등 많은 가수들이 대학가요제를 통해 스타로 입문했다.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돌고돌아가는 길〉·〈그때 그사람〉·〈해야〉·〈참새와 허수아비〉 등의 히트곡이 나왔고 이들 노래는 대학가뿐 아니라 중·고교생과 일반인들에게도 폭넓게 애창되었다. 이후 연예기획사에 의한 가요계 데뷔가 정식화되고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으로 인해 2014년 최종 폐지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변가요제는 1979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유원지에서 처음 개최되었고, 그 시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반영하며 1980년대까지 신인가수들의 중요한 등용문이었다. 1999년에 학력 제한을 없애고 만 17세 이상이면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역시 대학가요제와 마찬가지로 2001년 22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또 6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헤비메탈도 80년대에는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80년 중반부터 백두산, 부활, 시나위, 들국화 같은 그룹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오랜 문화적 전통과 감수성이 이런 계열의 음악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역사 연구자들은 당대 헤비메탈이 청년들의 학생운동과 관련해 저항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부컷: 저항정신의 소멸, 90년대

90년대라는 탈이념 시대가 도래하자, 7․80년대의 청년문화를 상징했던 저항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게 된다. 학생운동 즉 저항운동이 더 이상 청년문화를 담지 못하게 되면서 청년문화는 점차 대중문화와 맥락을 같이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자율성을 보이면서 서구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진다.

90년대의 특징은 X세대와 삐삐로 대변되기도 한다. 삐삐 이외에도 개인용 휴대폰, 컴퓨터의 등장은 X세대를 활자보다는 영상을, 편지보다는 통신에 익숙한 세대로 만들었다. 주로 가요에 초점이 맞춰진 90년대 대중문화는 015B, 전람회 등 대학생들이 가요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흔했고,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랩댄스 곡 〈난 알아요〉로 혜성처럼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중가요의 지배적인 관행이었던 통속적인 사랑타령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악 세계를 보여준 문제적 뮤지션이었다. 그는 주류 대중가요의 핵심적 흐름을 이끌면서도, 언더그라운드적인 문제 의식과 무게, 실험과 일탈의 요소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해 랩과 댄스가수 그리고 10대 팬들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열리게 된다. 이들과 함께 김건모, 신승훈의 메가히트로 90년대 대중문화는 정점을 찍는다. 후반기에 나타난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수는 그들에게 열광하는 새로운 팬 문화를 형성한다. 뛰어난 가창력보다는 외모와 댄스 실력이 주를 이룬 그들은 하나의 우상으로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후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IMF의 발생은 사회 전반적인 정체(停滯)를 의미했다. 대중문화 역시 이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IMF를 극복했지만,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7․80년대에 주류를 이루던 청년문화는 취업과 개인 생존의 문제로 문화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대학생들의 생존문제로 사라진 청년문화의 자리를 대신 연예기획사에 의해 길러진 아이돌이 메우고 있는 현실은, 청년문화의 소멸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김창남, 『대중문화의 이해』, 한울, 2010.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시공사, 1998. 임영태, 『대한민국50년사』, 임영태, 들녘, 1998. 편집부,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편집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웅진출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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