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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의 culture칼럼3
체로금풍 體露金風
2013년 11월 04일 (월) 13:01:17 박용하 <시인> eastpoem@hanmail.net

11. 또 헛산 건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올라오는 이 회한과 탄식은 낯익은 것이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한 해, 두 해, 수십 년을 후딱 까먹었다고 생각하니 그렇고 앞으로도 이 인생 별반 다를 것도 없으리라 생각해서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의 강도는 지난해 다르고 올해 다르며 내년엔 또 다를 것이다. 11월이 오면 그간 잘못 살았다 생각하는 것이며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자각하게 되는 걸까.

인근 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한 단풍이 잠깐새 마을 근처까지 와 있다. 나는 젊어서 잎을 꽃보다 좋아했던 사람인데 나이 먹으면서 꽃이 더 좋아졌다. 그렇다 해도 이 계절 곱게 물든 나뭇잎은 봄날의 화사한 꽃 못지않으니 눈부신 가을꽃이라 불러도 되겠다. 그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숨을 컥컥 틀어막고 지상을 태워버릴 듯 내리퍼붓던 지난 여름날의 기세등등하던 땡볕은 어느새 억세지 않은 열기의 가을볕으로 바뀌어 우리 곁을 결 곱게 난다. 바랠 것 같지 않던 녹음은 색을 바꾸면서 어찌 저리 고운 염색이 다 있는가 싶게 저절로 감탄이 나오게 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갈바람에 후두둑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영락없는 황금 눈보라며 그 은행나무 밑은 황금 눈보라 휘날리는 왕국이다. 들어가 보시라. 잠시 동안일지라도 낙원이 따로 없으리라. 나는 이름하여 11월족. 너는 11월족장.

가을이 깊어간다. 한 그루 나무에도, 여러 그루 나무에도, 만 그루 나무숲에도 가을이 들어차 잎을 물들이고 더없이 물든 잎은 덧없이 떨어져 내린다. 하나 둘 떨어지다 헤아릴 수 없이 떨어지고 우수수 떨어지다 못해 후두두두두둑 무너져 내린다. 나무는 좋겠다. 매해 꽃 피고 열매 맺고 잎 지고 다시 피고 지고 하니 생이 여러 번이겠다. 인간이 초목이 아니니 잎 피고 지듯 꽃 피고 지듯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니 하루를 삼 년처럼 살 수도 있는 것이고, 삼 년을 하루처럼 살 수도 있는 것이겠다. 인간이니까 백 년 전, 천 년 전의 세상을 헤아리고 다시 백 년, 천 년 뒤의 세상을 기약하는 것이겠다. 내가 산천초목이 아니니 산천초목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대해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규정짓고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나 내가 인간이니 인간이 처한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인간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나 죽음 앞에서 삶이라는 휴가를 보내는 시한부 인생들이다. 이 삶이 끝나지 않기라도 하듯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지만 천하 없는 인간도 이 지상을 움켜쥐던 손을 맥없이 놓고 한 잎 지듯 한 순간 떠나갈 것이다. 먼지가 일 듯이 이곳에 왔고 먼지가 가라앉듯이 이곳에서 사라질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까지 지상에 머물 게 아닌데 용서 못할 건 또 뭔가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이 11월에는 그 뵈기 싫던 인간도 조금은 놓아 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용서를 받아야 할 가해자는 대게 피해자의 고통엔 관심이 없으며 그 피해자가 강자가 되어 나타나기 전에는 용서를 구하는 일 따윈 안중에도 없기 십상인 까닭이다. 무슨 큰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다 알기라도 하듯 용서와 치유를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을 나는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도 이 지상에서 동거해야 한다고 저 삶은 말하지만 끝끝내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인간을 용서하는 건 용서가 아닐 것이다.

체로금풍’(體露金風)벽암록(碧巖錄)27칙에 나오는 말이다.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추풍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묻자 운문선사가 체로금풍”(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드러난다)이라 답했다. 11월이면 나무는 잎을 덜고 잎에 가려 있던 파란 하늘이 나뭇가지 사이로 더 파랗게 드러난다. 나뭇가지 사이로 높고 깊은 하늘뿐 아니라 박새나 참새의 비행술도 자유자재로 펼쳐진다. 말을 삼가고 침묵을 껴입는 11,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돼 살았던가 묻게 되는 11, 불필요한 허영과 수식과 과욕과 가식을 걷어내고 본체로 살아보고 싶은 이 욕망은 후텁지근한 습기를 덜어낸 서늘한 욕망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는 매일 태어나듯이 잠에서 깨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죽으러 가듯이 잠자리에 들지 않는가. 매일이 생과 사며 매순간이 생사 아닌 게 없다. 매일 삶을 마감하듯이 살고 싶다. 하루를 일생처럼, 그리하여 일생이 수천, 수만이도록 삶을 살아내고 싶다.

11월은 빛이 물드는 계절. 잎이 물들고 시간이 물들고 공기가 물들고 땅이 물들고 나도 너도, 그러다 우리는 한 순간 이 지상을 일엽편주처럼 떠나갈 것이다. 환생할 수 있다면 다음 세상에서는 인간 말고 한 그루 나무로 지구에 와 체로금풍하는 저 11월의 나무로 살아보고 싶다.

날이 서늘해지니 정신의 날이 서고 감정도 절박해진다. 인간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예나 이제나 인간이다. 사람을 아끼고 사람과 관계하는 일이 인생사 최대 숙제고 난제다. 더불어 인간은 누구나 만물의 자식이지 A종교나 B종교 같은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자식이 아니다. ‘’(인간)는 한 국가의 국민이기 전에, 한 도시의 도시민이기 전에, 한 마을의 주민이거나 원주민이기 전에 자연의 주민이다. 그리고 지구의 주민이고 이 별의 주민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삶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태어났으니 이래저래 번뇌다. 갈등을 견디고 갈등을 살아내는 게 삶일 게다. 나에게 가는 길은 너에게 가는 길만큼이나 가깝고도 멀고도 먼 길. 그래서 더더욱 나대로 나답게 내 길을 가며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내 사랑 11월엔.

 

 

한 그루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습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을 좋아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필자, 11전문

 

 

 

 

약력: 1989<강원일보> 신춘문예와 문예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한 남자4, 산문집 오빈리 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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