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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종이신문에서 인터넷 신문까지
2013년 11월 04일 (월) 06:48:20 정하나 기자 gksk3232@naver.com

신문은 사실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정기 간행물이며, 특정한 조직이 정보를 독자들에게 신문지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정기적으로 제공한다. 신문은 독자들에게 지식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이익을 추구하며, 공공성을 지닌 문화적인 대화형식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신문의 기원

중세기말 서양에서 등장한 신문이라는 인쇄물은 정보의 회로를 이어주는 고리로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대량의 정보를 제공받았고, 늘 새롭고 정확한 정보를 원했다. 그러므로 신문은 분명한 정보들을 공급해야만 했고, 그들의 관심을 위해 기술혁신을 이뤄야 했다.

15세기 후반 인쇄술 발전으로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는 1513년 ‘노이 짜이퉁 아우스 리텐 운트 폰 덴 모스코뷔터’(New Zeitung auss Litten und von den Moscowitter)을 간행했다. 1540년 비엔나에서 한스 징그리너(Hans Singriener)가 ‘노비테텐’(Novitäten)을 발행했으나 실제적으로 관청의 공고였다.

16세기 말 독일의 인쇄업자들이 정치관한 정보가 있는 전단지과 소책자를 불규칙적으로 발행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쾰른으로 이주해온 미하엘 폰 아칭(Michael von Aitzing)은 1588년에 교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한 보도를 간행하고, 6개월간의 간격을 두고 최근에 일어난 사건의 요약을 인쇄했다. 15~16세기 출판물은 현재의 신문과 다르게 독자, 인쇄업자, 정보제공자 사이에 지속적인 관계를 확립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이 1609년 독일에서 발행되었다. 17세기 초에 유럽 상당수에는 인쇄소 및 지방의 유통망이 확립됐다. 17세기에 종교전쟁이 발발하면서 뉴스의 수요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영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은 암스테르담에서 인쇄되었다. 이것은 인쇄된 코란토(coranto)였다. 1620년에 영자신문으로 제작되어 네덜란드로부터 북해를 건너 영국으로 배달된 코란토는 신문으로서의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고, 이를 통해 유럽 각 지역 간에 소식이 교류되었고, 뉴스 필자와 독자들 사이에서도 정기적인 소통도 가능해졌다.

 

 

2.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

①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됐다. 그 신문은 1882년 8월 일본에 갔던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창간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들은 조선이 19세기 말 서양 열강과 국교를 맺게 되어, 대외 교섭 과정에서 조선이 국력을 신장 해야겠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다.

‘한성순보’의 편집체재는 국내기사, 각국의 근사, 그리고 각국의 여러 가지 현황과 서양의 과학기술 등 각종 학문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성순보’는 창간 13개월 후인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신문을 발행하던 박문국이 인쇄시설과 함께 파괴당하여 폐간되고 말았다.

조선 정부는 신문이 어느 일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로서 중요한 기관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새로운 신문발간을 계획해 ‘한성주보’를 창간하게 되었다. 한성주보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사적(史的)인 의미를 가진다. 첫째, 속보성이다. 주보는 일주일 단위로 발행기간을 단축했다. 발행회수가 빨라져서 신문으로서 뉴스를 더욱 신속히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신문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순보에 비해 외국 기사를 줄이고 국내 기사와 의견기사의 비중을 늘려서 신문의 보도 논평 기능을 강화했다. 셋째, 양력 단위를 채용했다. 넷째, 한글 기사를 도입했다. 한글 기사를 싣기 시작하여 더 많은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도 2년 반 동안 발간되다가 1888년 7월에 폐간되었다.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 ‘독립신문’ 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이 창간되고 여러 종류의 민간 신문이 자생적으로 나온다. 개화사상 확산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신문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독립신문, 매일신문, 시사총보는 폐간된다.

1904년 7월 18일에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영국인 베셀이 발행하여 일본군의 검열을 피해 민족진영의 논객이 강력한 항일 언론을 편다. 그러다가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을 공포하여, 조선을 신민지로 통치했다. 이미 ‘한일합방’ 이전에 이완용이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게 하여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를 강제로 매수하여 총독부의 한글판 기관지로 만든 후 대한을 제거하고, ‘매일신보’로 개명된다. 이 당시 총독부는 매일신보만 빼고 모두 폐간시킨다.

1920년대 조선어 민간신문이 발행되면서 조선에서 ‘신문사진’이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현태인 미디어가 들어온 시기는 일제 지배와 맞물렸다. 때문에 신문사진이 도입된 초기부터 식민 지배를 저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3  1 독립 운동이후로 일제는 무단 정치 대신 문화 정치라는 구호로 우리 민족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에게도 신문지법에 의한 신문 잡지의 발행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1920년에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이 창간 허가를 받았으며 잡지의 출판도 활기를 띠었다. 1929년 12월 말 총복부에 등록된 조선인 발행 신문이 모두 6종이나,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은 모두 34종이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해방이 되면서 언론도 되찾게 된다.

 

② 해방기~90년대

우리나라가 해방 후 언론의 자유를 얻는다. 광복 후 신문을 제작이 가능한 사람이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 언론을 종사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언론계는 일본어 신문과 매일신보를 제작하던 한국인이 계승하고, 일본식 제작 방법과 신문 문화를 그대로 수용한다.

1946년 5월 29일 미군정 당국은 신문 ·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에 대한 법령 제88호를 공포하고 종래의 등록제를 허가제로 변경함으로써 무질서한 간행물의 범람을 막고 좌익계열의 선동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10월 11일에 아놀드 미군정장관이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이를 매일신보가 반박하자, 미군정은 2일간 정간 처분을 내린다. 10월 20일에 미군정이 신문을 접수한다.

4·19혁명 후에 개정된 헌법은 “모든 국민은 언론 · 출판의 자유와 집회 ·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13조)고 규정함으로써 신문발행에 대한 허가제를 폐지하고 등록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후 8개월 뒤인 1961년 2월 말에는 4 · 19혁명 이전에 41종이던 일간지가 무려 124종으로 3배나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언론기관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남으로써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5 · 16군사정변 직후 언론기관의 일제정비와 1980년의 언론통폐합으로 각 도에는 1개의 일간지만 남고, 서울에는 3개씩의 조간과 석간만 발행되었으며, 방송은 공영제로 되었다.

1987년의 6 · 29선언과 1988년 제6공화국의 출범 이후의 언론 자율화정책을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더욱 확대하여 발행과 편집의 자유는 계속적으로 신장되었고 새로운 신문이 대량으로 창간되었다. 신문·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자유로워졌으므로 언론 환경은 제5공화국 또는 그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호전된 것이다. 자율화 이전인 1987년에는 전국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이 32개였으나 1994년 6월 118개로 86개 신문이 늘어났다.

한편 편집에 있어, ‘가로짜기’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글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하여 구독률을 올리겠다는 상업적 의도가 맞물려 있다. 일간지 중에서 최초로 전면 가로짜기를 시도한 신문은 호남신문이었는데, 결국 여론 조사 이후 세로짜기로 돌아가 버렸다. 그후 1958년 1월 대학신문인 연세춘추가 신문 전면에 한글 전용과 가로짜기를 시도하였고, 1983년 4월 동아일보가 스포츠 면을 가로짜기로 바꾸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85년 6월에는 스포츠서울이 젊은 독자층을 겨냥해서 전면에 가로짜기를 단행했고, 그 덕분에 발행부수가 배가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1988년 5월 15일 창간된 한겨레신문은 순한글 전면 가로짜기 체제로 창간됐다. 뒤이어 스포츠 조선(1990년 3월 21일)도 가로짜기 신문으로 출범하고, 중앙일보가 1995년 10월 9일부터 전지면 가로짜기를 도입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겉지―세로쓰기’, ‘속지―가로쓰기’의 형태를 띤 과도기를 거쳐, 현재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로 전환되어 있다.

 
   

3. 인터넷 신문 vs 종이 신문

인터넷 신문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인쇄 신문을 발행하는 기존 언론사의 종속형 신문과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공급하는 독립형 신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3월에 ‘중앙일보’가 국내 최초로 종속형인 인터넷 신문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제공했다. 독립형 인터넷 신문은 기존의 언론사를 설립하는 데 요구되는 거대한 자본, 신문 제작 기계와 인력 확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비교적 손쉽게 회사를 설립해 온라인으로만 뉴스를 공급하는 형태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2000년 2월 ‘오마이뉴스’가 독립형 인터넷 신문으로 출범했다.

언론사는 ‘뉴미디어의 선봉자’로 자처하면서 인쇄 신문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 싣는 온라인 신문 사이트를 개설했다. 그들은 인쇄 신문의 제작비를 줄이고 온라인 광고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 시대를 구가해온 TV와 신문 종사자에게 광고를 게재해온 광고주들은 수용자의 변화가 큰 관심사이다. 또한 인간이 사용하는 미디어 이용량은 하루 생활 가운데 어느 정도 일정한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 미디어의 이용시간을 놓고 경쟁을 벌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인터넷의 폭발적 증가는 분명 기존 미디어에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신문은 인터넷상에서 뉴스를 제공하는 기자와 그 매체에 대한 신뢰가 확보되고 전문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된다면 종이신문의 경쟁력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광고 영업을 통한 수입과 독자 구독료를 통한 수익, 유료 정보를 통한 수익은 향후 성장성이나 수익 면에서는 인터넷 신문이 종이신문을 대체하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터넷 신문이 종이 신문의 위상을 쉽게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이 신문은 분석력과 심층적인 면에서는 경쟁력이 높고, 어떤 매체보다 독자들에게 친밀하게 읽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종이 신문을 만드는 신문사는 인터넷 신문을 운영함으로, 인터넷 신문의 시장 자체가 경쟁과 보완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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