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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의 Culture 칼럼 ⑨ 텔레비전 에피소드
2013년 06월 02일 (일) 16:45:37 박상<소설가> 1morefly@naver.com

 

 

식당에서 TV를 보았다. 무한도전 한국사특강 편이었다. 문득 런던에서 살 때가 떠올랐다. 집에 TV도 없고 인터넷도 너무 느려 영상문명과는 동떨어진 시간을 보냈다. 아침저녁으로 알바 투 잡 뛰고 돌아와 시체처럼 자는 삶에 여가나 문화생활이라곤 없었다.

어느 주말, 브릭레인 벼룩시장에 갔다가 중고 TV를 파는 남자를 발견했다. 꽤 커다란 TV였는데 요즘 나오는 평면형태도 아니고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사각형 브라운관이었다. TV에선 요리 프로그램이 선명한 화질로 나오고 있었다. 난 지금도 TV를 거의 보지 않고, 간혹 야구중계만 보는 사람이지만 그땐 갑자기 군침이 돌았다. 이 인류 문명의 총아를 나는 왜 외면하고 사는가! 제이미 올리버에게 요리를 배울 수도 있는데! 뿐만 아니라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맥주와 감자튀김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TV 파는 남자는 아스날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나는 아스날 광팬인 척하며 흥정해서 달랑 40파운드(8만원)TV를 샀다. 문제는 내가 이스트 런던 끄트머리 빈민가에 산다는 점이었다. 비싼 블랙캡(빌어먹을 런던택시)을 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게 뻔했다. 결국 TV를 안고 낑낑거리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모르겠고, 과일 일 파운드에 한 바께스!” 라고 외치는 불쌍한 표정의 아저씨에게 사버린 과일봉지까지 한쪽 손목에 덜렁덜렁 매단 채로 말이다. 젖 먹던 힘이라는 건 군대에서 이미 다 써버렸고, 피 같은 외화 40파운드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지 않으려면 자기 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TV인 척 하는 금괴를 들고 있는 거야, 가져가기만 하면 다 내 거라고.’ 그러나 오는 내내 체력이 고갈되고 의식이 혼미해졌다. TV를 발목에 묶고 템즈강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집에 도착한 건 순전히 신의 가호였다. 그런데 팔다리의 통증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런 젠장, 기대감으로 뺨을 잔뜩 부풀린 채 TV를 켰는데 방송 비슷한 게 하나도 안 잡히는 게 아닌가. 동그란 모양의 안테나를 부러질 때까지 돌려봐도 사선이 그어지거나 초현실적인 화면만 잡혔다. 모든 방송에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 특집이라도 하는 중인가. 좁은 방구석 여기저기 TV를 옮겨 봐도 절망적이었다. 뒷마당 한복판에 놓고 안테나를 완전히 눕히면 그나마 BBC가 살짝 잡혔는데 그 화면을 1분만 보면 눈이 멀거나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TV 따위를 뒷마당에 나가서 보느니 그냥 협탁으로 쓰는 편이 낫잖아. 나는 피눈물을 허공에 흩뿌리며 뛰쳐나가 TV 값에 육박하는 성능 좋은 안테나를 사왔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생활비와 멘탈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다음에야 그곳이 지붕에 레이더를 설치해도 TV가 안 잡히는 난시청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과일을 먹고 기운 차리려 했으나 윗부분 몇 개만 빼면 다 썩은 것들이었다. 그 일로 나는 한동안 한 봉지에 20P(400)짜리 인도산 인스턴트 누들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건 딱 오줌 맛이었다.

나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생각을 하고 액션을 취하자, 과일이 싸면 의심하고 보자, 웬만하면 충동구매를 하지 말자, 사람은 TV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인도산 라면으로는 못 산다, 등이었다. 인생이란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시간의 흐름 아니겠나. TV 안 봐도 바보가 되지 않는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나는 돈이 아까워 죽을 뻔 했지만 TV 대신 라디오와 책을 즐기며 상상력과 정서가 풍부해지는 기쁨을 누렸다.

뜬금없지만 다시 무한도전 얘기로 돌아와서, 그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역사를 강의하는 걸 보고 코끝이 찡했다. 교양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때문에 줄줄이 퇴출당하는 마당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예능프로그램이 애쓰는 데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런 사회적 수준이 참 어설프다는 생각으로 입맛이 썼다. TV에서 다루지 않으면 자기 나라 역사조차 알려고 하지 않을 정도란 말인가. 이 사회가 역사라는 안테나 없이 지지직거리는 화면처럼 초현실적이란 말인가. 돈 따위가 상식이고 역사가 상식이 아닌 나라에 개뿔 찬란한 미래가 있을까.

에고, 갑자기 팔다리와 대가리가 뻐근하면서 인도산 라면 맛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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