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9. 3. 13 수 20:51
학위수여식,
   
> 뉴스 > 종합
     
최치운신도비 탁본(崔致雲神道碑 拓本)
11월 박물관 소장유물
2012년 11월 08일 (목) 13:03:20 학술부 kdunp@hanmail.net
 
   

금번 소개되는 유물은 최치운신도비 탁본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종2품(從二品) 이상의 뚜렷한 공적(功績)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무덤(墓)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죽은 이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비석의 주인인 최치운(1390~1440)은 강릉사람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계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서 백경(伯卿), 호는 조은(釣隱)이다. 고려조 경흥부원군(慶興俯院君)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안린(安麟)이고, 어머니는 정선 전씨이다.


1408년(태종 8) 1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23세 때 강릉향교가 전소되자 향유(鄕儒) 68인과 더불어 공장(供狀)을 올려 향교를 중수하도록 하였다. 1417년(태종 17)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정자(正字), 승문원 저작(箸作), 박사(博士), 부교리(副校理), 집현전 수찬(修撰), 전농시 주부(典農寺 主簿), 교리, 공․예․이조 참판, 예문관 제학 등을 거쳐 세자(후일의 문종)의 학문을 가르치는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그는 1433년(세종 15)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催閏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고, 1439년(세종 21) 공조참판 때 계품사(計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야인 회유에 관하여 논의하는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외교적 공적을 쌓았다, 또한『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고 율문을 강해(講解)하는 등 형옥(刑獄)에 관해서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1645년(인조 23) 강릉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신도비는 1888년(고종 25) 후손 최원집(崔遠集) 등이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의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 입구에 위치한 삼현비각 안에 있다. 비문은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지었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석여(曺錫輿)가 썼다. 탁본의 크기는 182×98㎝이다.


 

ⓒ 가톨릭관대신문(http://news.cku.ac.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210-701 강릉시 범일로 579번길 24(내곡동) | 전화 : 033)649-7880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창희
Copyright 2008 가톨릭관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kunp@naver.com